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황교익/비판과 논란/일본 유래설 (문단 편집) == 감자면 논란 == >함흥냉면은 애초 감자 전분으로 면을 뽑았다. >감자 전분 면의 출발은 일제강점기로 보아야 한다. >조선에도 감자가 있었는데? >맞다. >1800년대 초중반에 감자가 이 땅에 들어왔다. >그러나 그리 많이 심은 것은 아니다. >조선의 교통 사정과 문물 전파 속도로 보면 감자는 극히 일부 지역에 재배되었을 것이다. >또 일부 지역에서 감자가 심어졌다 하나 그 감자로 국수를 내려 먹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먼저, 감자로 전분을 만드는 것 자체가 매우 힘든 일이다. >몇 달을 삭히고 내리고 말리고 빻고.. 국수 하나 먹자고 이 일을 감당할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또 당시의 나무 국수틀도 감자 전분 면을 뽑기에 적당하지 않다. >대체로 물렁한 메밀로도 장정 서넛은 붙어야 면을 내릴 수 있는데 '돌반죽'이라도 불리는 감자 전분 반죽으로 면을 뽑는다는 것은 너무 힘든 일이다. >감자는 쪄서 먹고 갈아서 부쳐 먹으면 맛있는데, 뭔 중뿔나는 일이 있다고 힘들게 국수를 뽑겠는가. >그 당시 메밀은 흔했고, 국수 먹자면 그 메밀로 다들 국수 내려 먹었다 보아야 한다. >더 나아가 생각을 하면, 조선에서는 감자로 전분을 만드는 기술 자체가 없었을 수도 있다. >감자 전분을 따로 만들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감자 전분이 필요하였던 것은 일제였고, 그들에 의해 감자 전분 만드는 법이 보급되었다. >이래저래 일제 이전에 감자 전분 면은 없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 >일제는 함경도에 감자를 집중적으로 심었다. >특히 개마고원 개발에 나서 그 땅에 온통 감자를 심었다. >조선 신민의 먹을거리를 위해 심은 것이 아니다. >이를 전분으로 만들어 일본으로 가져갔다. >어디에 쓸려고? >알코올 뽑으려고. >비행기, 탱크 등등의 원료로 쓰려고. >감자 전분은 그 외에도 철강공업, 섬유공업에도 쓰인다. >개마고원을 비롯해 함경도 전역에서 생산된 감자 전분은 함흥, 흥남 등의 항구로 집결되어 일본으로 실려나갔다. >감자 전분이 흔해지니 누군가 면을 뽑아봐? 하고 생각하였을 것인데, 마침, 그러니까 1920년대에 기계화된 냉면기가 개발된다. >유압이나 공압으로 힘 안 들이고 면이 쑥쑥 뽑히는, 요즘 냉면집에 가면 볼 수 있는 그 냉면기이다. >그렇게 하여 공업용 감자 전분이 면 재료로 등장하게 된다. >애초 이 감자 전분 면을 농마국수라 하였다. >농마는 녹말의 함경도 사투리이다. >녹말은 원래 녹두 분말을 뜻하였는데, 감자 전분을 처음 접하는 이들의 눈에 녹말처럼 보여 그리 부른 것이다. > >감자 전분 면을 뽑기는 하였는데, 이게 아무 맛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밀과 메밀의 면에는 곡물의 향이 있다. >감자는 그게 없다. >단지 쫄깃한 듯 질길 뿐이다. >그렇게 하여 아무 맛이 없는 이 감자 전분 면에 맛을 더하기 시작하였다. >달고 짜고 맵고 시고 하는 온갖 양념이 추가되었다. >감자 전분 면이 주로 비빔인 이유가 다 있는 것이다. >이 감자 전분 면을 두고 함흥냉면이라 이르기 시작한 것은 한국전쟁 이후의 일이다. >그 전에는 농마국수라 불렀다. >감자국수, 감자농마국수라 불리지는 않았고? >감자의 그때 이름은 마령서였다.(김동인의 소설 [감자]도 감자가 아니고 고구마이다.) >그냥 농마국수라 불렀다. > >요즘은 함흥냉면을 감자 전분으로 뽑지 않는다. >고구마 전분이 더 싸 고구마 전분으로 면을 뽑는다. >고구마 전분으로 뽑든 감자 전분으로 뽑든 큰 의미는 없다. >둘 다 특별난 향이나 맛이 없고 단지 쫄깃한 듯 질긴 조직감만 줄 뿐이기 때문이다. >---- >[[https://m.blog.naver.com/foodi2/30170969875|다시, 함흥냉면]][[http://archive.is/BOmFB|@]] 감자면 또한 [[http://gyoik.com/index.php?mid=contents&page=2&document_srl=433|일제강점기에 시작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감자가 전래된 것은 그 이전이지만, 조선의 열악한 교통 운송 환경상 퍼지는 데 느렸을 것이라는 논리. 우선 감자의 전래에 대해서 말하자면, 감자는 19세기 초반에 조선에 전래되어 들어왔고, 18세기 후반에 먼저 들어온 고구마처럼 조세 대상이 아니라는 이유로 급속도로 퍼졌다. 다만 고구마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있었기 때문에 감자는 고구마를 키울 수 없었던 지역에 집중되었으며, 또한 감자와 고구마는 그 특성상 주로 물빠짐이 심하고 황폐한 곳에 집중되었기 때문에 쌀과 보리 등의 작물이 자리잡기 어려운 지역에서 주로 생산되고, 그 지역 주민들이 겨울과 보릿고개를 버티는 구황작물로 소비되었다. 감자의 재배 자체는 감자를 필요로 하는 일부 지역에서 주로 이루어지고, 서울에서 최초로 재배된게 19세기 후반에 외국인 선교사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일제시기 전에는 전국적으로 유통되는 작물이 아니였다고 할 수는 있지만 감자를 키울 필요가 없었거나 필요를 못느꼈기 때문이지 교통 탓에 전파가 안된 것이 아니다. 그리고 감자나 고구마가 아니더라도 쌀, 보리, 밀, 수수와 같은 곡물과 줄기/뿌리식물으로부터 전분을 추출하는 기술은 상당히 오래전부터 다양하게 존재했다. 도토리묵도 힘든 과정을 통해 얻은 도토리 전분으로 만들어 먹는 것인데 감자 전분을 못얻을 이유가 있을까? 심지어 [[한국인의 밥상]]에서 나온 것처럼 썩은 감자로부터 전분을 추출해내서 쓸 수 있기 때문에 황교익 말대로 쪄먹기 바빴다고 해도 썩은 감자가 나오면 그걸로 전분을 만들면 되고, 황교익이 말한 갈아서 부처먹는다는 게 [[감자전]]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감자전의 조리방법이나 감자떡을 생각하면 정말 엉뚱한 소리이다. 그리고 전분은 요리에 사용하는 것 이외에도, 풀을 만들어서 옷에 먹이거나 도배, 공예 등에 다양하게 쓰이기 때문에 얻어야할 이유가 많다. 마지막으로 함흥냉면 자체는 일제강점기 때 감자를 이용한 산업과 함께 크면서 발달하긴 했어도 감자나 고구마 전분을 이용한 면은 있었다. 감자면 자체의 유행은 일제강점기가 본격적이라 볼 수 있고 오늘날 볼 수 있는 기계식으로 제면된 감자면 또한 시작은 일제강점기가 맞겠지만 고작 그거 하나를 위해서 조선을 감자에서 전분 하나 못얻어내는 나라로 취급하는 모습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